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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 墓碣銘 先生自銘竝書

  • 이동구
  • 2009-04-30 오후 2: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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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墓碣銘 先生自銘 竝書

 銘 : 退溪先生 自銘

竝書 : 奇大升 撰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 學求愈邈 爵辭愈嬰

進行之跲 退藏之貞 深慙國恩 亶畏聖言 有山嶷嶷 有水源源

婆娑初服 脫略象訕 我懷伊阻 我佩誰玩 我思古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隆慶四年春退溪先生年七十再上箋乞致仕 不許秋又申乞致仕 不許十二月辛丑先生卒訃聞 上震悼 命贈領議政葬用議政禮遠近聞之無不齎咨歎惜相與吊哭明年三月壬午葬家東搴芝山南支先生姓李氏諱滉字景浩嘗卜居退溪因以自號後構書堂陶山又號陶叟其先眞寶縣人六世祖碩起縣吏中司馬試 贈密直使有子曰子脩官至判典儀寺事討紅賊有功封柗安君移居安東周村高祖諱云侯軍器寺副正 贈司僕寺正妣淑人權氏曾祖諱禎善山都護府使 贈戶曹參判妣貞夫人金氏祖諱繼陽成均進士 贈吏曹判書移寓禮安居溫溪里妣貞夫人金氏考諱埴成均進士累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妣義城金氏春川朴氏俱  贈貞敬夫人先生生未晬而孤少受學于叔父松齋公旣長劬書厲志益自刻若嘉靖戊子進士甲午登第爲承文院副正字轉博士遷成均館典籍戶曹佐郞丁酉冬丁內艱服闋拜弘文館修撰歷司諫院正言司憲府持平刑曹正郞弘文館副校理校理兼 世子侍講院文學議政府檢詳轉舍人司憲府掌令成均館司藝兼侍講院弼善司諫院司諫成均館司成乞假展墓明年甲辰春以弘文館校理 召還除左弼善遷弘文館應敎典翰病免爲司甕院正復授典翰李芑啓請削官已而芑又請勿削授司僕寺正丙午春乞假葬外舅以病見遞丁未秋授應敎被 召旣至病免戊申正月出守丹陽郡換豊基己酉冬病辭徑歸被劾奪二階壬子夏拜校理承 召還朝除司憲府執義改副應敎陞秩成均館大司成病免復爲大司成爲刑曹參議兵曹參議俱以病免爲僉知中樞府事乙卯春在告解職雇舟東歸拜僉知中樞拜弘文館副提學連被 召命皆辭以病戊午秋上疏乞免收召 御批不許入都謝 恩拜大司成俄拜工曹參判累辭不許明年春乞假歸鄕三上狀請免授同知中樞府事乙丑夏上狀陳懇解官以居冬下 旨特召復授同知中樞丙寅正月力疾登道陳狀乞骸道拜工曹判書又兼大提學遂力辭新 命還家竢罪遞授知中樞府事丁卯春以 詔使將至有 召命六月入都會 明宗昇遐今 上嗣服拜禮曹判書辭不許以病免卽東歸十月有 召命授知中樞旋以 敎書促行具疏力辭戊辰正月拜議政府右贊成又具疏極陳難受之義又下 敎書促行上狀懇辭遞爲判中樞府事七月詣 闕謝辭上疏陳六條又獻聖學十圖拜大提學吏曹判書右贊成皆力辭不拜己巳三月上箚乞歸箚四上猶不已 上知其不可留引見慰諭 命馳驛護遣是月先生至家上狀謝 恩仍乞致仕初先生寢疾戒子寯曰我死該曹必循例請用禮葬汝須稱遺令陳疏固辭且勿用碑石只以小石題其前曰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略敍世系行實于後如家禮所云可也又曰此事若託人爲之相知如奇高峯必張皇無實之事以取笑於世故常欲自述已志先製銘文而因循未畢藏在亂藁中搜得用之可也寯旣受戒再上疏辭禮葬不得 命遂不敢更辭墓道之表用遺戒刻其銘嗚呼先生盛德大業卓冠吾東者當世之人亦旣知之矣後之學者觀於先生所論著將必有感發默契焉者而銘中所敍尤足以想見其微意也迂愚無狀蒙先生奬厲成就不啻如父母天地之恩而山頹樑壞無所依歸竊念遺戒之言雖不敢違而所以揭阡詔後者亦不可泯其迹敢記其大槪而爲之辭曰先生幼而端序長益涵揉中歲以後絶意外慕專精講究洞朗微妙充積發越人莫能測而方且謙虛卑遜若無所有蓋其日新上達有不能已者至於出處去就相時度義務求吾心之所安而終亦無所詘焉其所論著反覆紆餘光明俊偉粹然一出於正揆諸孔孟程朱之言其不合者寡矣亦可謂建諸天地而不悖質諸鬼神而無疑也嗚呼至哉先生再娶先娶金海許氏進士瓚之女産二男後娶安東權氏奉事礩之女俱 贈貞敬夫人子寯奉化縣監寀早世孫男三人曰安道辛酉生員曰純道曰詠道女二人長適士人朴欐側室子一人曰寂.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년에는 병이 많았네. 중년에는 어쩌다 학문을 좋아했으며 말년에는 어쩌다 벼슬에 올랐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멀기만 하고 관작은 사양할수록 몸에 얽이네. 세상에 진출하면 실패가 많았고 물러나 은둔하면 올 바랐네! 국가의 은혜에 깊이 부끄럽고 성인의 말씀이 참으로 두려워라. 산은 높이 솟아있고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도다. 선비의 옷을 입고 한가로이 지내니 뭇 비방을 무시하였네. 내 그리워하는 분 저 멀리 있으니 나의 패옥 누가 알아주리. 내 고인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과 맞는구나. 어찌 내세에서 나의 지금을 좋아하지 않는다하리. 근심스러운 가운데 낙이 있고 즐거운 가운데 근심이 있네. 대화를 타고 죽어가니 다시 무엇을 구하리.


 융경 4년(선조 3년, 1570) 봄에 퇴계 선생은 나이가 70세였는데, 재차 전문(箋文)을 올려서 치사(致仕)할 것을 청했으나 상(上)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가을에 또다시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축일에 선생께서 별세하시어 부음이 전해지자, 상은 크게 애도하시고 영의정을 추증하고 장례는 의정의 예를 쓰도록 명하였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들 슬퍼하고 애석해 하며 서로 곡하고 조문하였다. 다음해 3월 임오일에 집 동쪽의 건지산 남쪽 자락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다. 일찍이 퇴계에 집터를 정하여 살고 인하여 스스로 호하였으며, 뒤에 도산에다가 서당을 짓고 또 도수(陶叟)라고도 호하였다. 그 선대는 진보현 사람이었다. 6세조 석(碩)은 고을의 아전으로서 사마시에 합격하고 밀직사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인 자수(子修)는 벼슬이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으며,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송안군에 봉해졌는데, 이분이 안동 주촌(周村)으로 이거하였다.


 고조의 휘는 운후(云候)인데 벼슬이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으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고조비는 숙인 권씨이다. 증조의 휘는 정(禎)인데 벼슬이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증조비는 정부인 김씨이다. 조의 휘는 계양(繼陽)인데 성균진사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예안으로 우거하여 온계리에 거주하였다. 조비는 정부인 김씨이다. 선고의 휘는 식(植)인데 성균진사로 여러 번 추증을 받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으며, 선비는 의성김씨와 춘천박씨로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출생하신지 한 돐이 못되어 부친을 여의고, 어려서는 숙부인 송재공(松齎公)에게 수학하였다. 이미 장성하자, 학문에 힘쓰고 뜻을 가다듬어 더욱더 스스로 각고하였다. 가정 무자년(중종 23년,1528)에 진사가 되고, 갑오년(중종 29년,1534)에 문과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박사(博士)로 옮겼으며, 성균관 전적과 호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정유년(중종 32년, 537)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그 후, 3년 상을 마치고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 형조 정랑과 홍문관부교리 겸세자시강원문학, 의정부검상을 지냈으며, 다시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옮기고, 사헌부 장령과 성균관사예 겸시강원필선, 사간원 사간과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는데, 성균관 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휴가를 얻어 성묘하였다.


 다음해인 갑진년(중종 39년,1544) 봄에는 홍문관 교리로 소환되어, 좌필선에 임명되고, 홍문관 응교와 전한으로 천직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으며, 사옹원 정(司甕院正)이 되었다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 이 때 간신 이기가 삭탈관직하도록 계청(啓請)하였다가 얼마 후 또다시 삭탈관직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


 병오년(명종1년,1546) 봄에는 휴가를 받아 외구(外舅)를 장례하고 병으로 체직되었다. 다음해인 정미년 가을에는 응교로 임명되고 부름을 받았으나 서울에 도착한 다음 병으로 면직되었다. 무신년 정월에는 외직으로 나가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풍기를 맡았다. 기유년 겨울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곧바로 돌아갔다가 탄핵을 받아 두 계급을 박탈당하였다.


 임자년(명종7년,1552) 여름에는 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아 조정에 돌아와 사헌부 집의에 제수되었으며, 다시 부응교로 옮겼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 후 병으로 면직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고, 형조 참의와 병조 참의가 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면직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을묘년 봄에 휴가로 있던 중 해직되자, 배를 세내어 동쪽으로 돌아왔다. 그 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고 연달아 부르는 명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무오년(명종13년,1558) 가을에는 상소하여 면직되기를 청하고 부르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께서는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선생이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니 대사성에 임명하고, 얼마 후에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세 번이나 글을 올려 면직되기를 청하여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을축년(명종20년,1565) 여름에는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기거하였다. 겨울에 상은 특지를 내려 부르고 다시 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병인년 정월에 선생은 병을 무릅쓰고 길에 올라 글을 올려 집에서 쉴 것을 청하였는데, 서울에 올라오는 도중 공조판서에 임명되고 또 대제학에 겸직되었다. 선생은 마침내 새로 내린 벼슬을 강력히 사양하고 집에 돌아와 죄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벼슬이 체직되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정묘년(명종22년,1567) 봄에는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오게 되었으므로 부른 명이 있었다. 선생은 6월 도성에 들어갔는데, 이때 마침 명종이 승하하고 금상(今上 선조)이 뒤를 이었다. 금상이 선생을 예조판서로 임명하자, 선생은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후 병으로 면직되고 즉시 동쪽으로 돌아왔다. 10월에 부르는 명령을 받고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곧바로 상께서는 교서를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다.


 무진년(선조1년,1568) 정월에 의정부 우찬성에 임명되자, 선생은 다시 상소하여 받기 어려운 의리를 극구 말씀하셨다. 교서를 다시 내려 올라올 것을 재촉하자, 선생은 글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고 판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7월에 선생은 대궐에 나아가 사양하고 글을 올려 6개 조항을 아뢰었으며, 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렸다. 그 후 대제학과 이조판서,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사년 3월에는 차자(箚子)를 올려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는데, 차자를 네 번이나 올리면서 그치지 않았다. 상께서는 더 이상 만류할 수없음을 아시고는, 인견(引見)하여 타이르시고 역졸을 딸려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달에 선생은 집에 도착한 다음 글을 올려 사은하고 인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다.


 처음에 선생께서는 병환이 위중하자, 아들인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예조에서는 반드시 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도록 청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나의 유명이라 칭하고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며, 또 비석을 쓰지 말고 다만 작은 빗돌에다가 전면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고만 쓰고, 세계(世係)와 행실을 뒤에 간략히 서술하여 <가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 일을 만일 남에게 부탁하여야 할 경우, 아는 사람 중에 기고봉 같은 이는 반드시 실상이 없는 일을 장황히 늘어놓아 세상에 비웃음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스스로 나의 뜻을 기술해서 미리 명문을 짓고자 하였으나 미뤄오다가 끝내지 못하고 난고(亂稿) 가운데 보관되어 있으니, 찾아서 써야 한다" 하셨다.


 준은 이 경계를 받고 선생이 별세하시자,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자,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묘도(墓道)의 표(表)는 유계를 따라 그 명문을 그대로 썼다.


 아! 슬프다.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업적이 우리 동방에 으뜸임은 당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후세의 학자들도 선생이 말씀하고 저술한 것을 관찰한다면, 장차 반드시 감발(感發)되고 묵계(默契)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문 중에 서술하신 것은 더욱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활(迂闊)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나는 선생의 장려를 받아 성취되었으니, 부모와 천지의 은혜보다도 더한데, 선생이 별세하시니, 태산이 무너진 듯 대들보가 꺾인 듯하여 의귀(依歸)할 곳이 없다.


 남기신 경계의 말씀을 엎드려 생각하니, 감히 어길 수가 없으나 묘도에 게시하여 후세에 알리는 것을 또한 인할 수가 없으므로 그 대략을 기록하고 이에 대한 말을 붙인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질서가 있었으며, 장성하여서는 더욱 함양하고 교유하였다. 중년 이후로는 부귀공명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탐구에 힘써서 미묘한 진리를 훤히 꿰뚫고 충적(充積)하고 발양하여 사람들이 측량할 수가 없었는데, 선생은 겸허하고 공손하시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이 하셨다. 날마다 공부를 새롭게 하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여 그치지 않았다.


 출처와 거취의 의리에 있어서는 때를 보고 의를 헤아려 자신의 마음에 편안한 바를 추구하고 또한 끝내 굽힌 바가 없었다. 그 논저는 반복하고 무궁하며 위대하여 한결같이 순수하게 정도(正道)에서 나왔으니, 저 공맹(孔孟)과 정주(程朱)의 말씀으로 헤아려 봄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적다. 선생 역시 천지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아니하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이 없다고 이를만하니 아! 훌륭하시다.


 선생은 재취하셨다. 먼저는 김해 허씨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는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생산하였으며, 뒤에는 안동권씨에게 장가드셨는데 봉사인 권질의 따님이시니, 모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아들은 장자인 준은 봉화현감이고, 채(寀)는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손자는 셋인데, 안도(安道)는 신유년 생원이었고, 다음은 순도(純道)와 영도(詠道)이다. 딸은 둘인데 장녀는 박려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의 아들로는 적(寂)이 있다.


<出處 : 原文  退溪先生年譜卷之三. 飜譯  民族文化推進會>

<참고사항>

退溪先生은 별세하기 나흘 전인 1570년 음력 12월4일, 병세가 위독해지자,

조카 영(寗)<온계 次子> 불러서 다음과 같이 當付하였다. 朝廷에서 예장(禮葬)을 하려고 하거든 나의 遺命이라 稱하고 辭讓하라. 碑石을 세우지 말고, 단지 조그마한 돌에다 앞면에는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고, 뒷면에는 世系와 行實을 簡略히 敍述하여 家禮에 맞게 하라.

이어서 이일을 남에게 부탁하면 내가 아는 奇高峰같은 이는 張皇無實之事를 기록하여

세상에 비웃음을 살 것이니 亂稿가운데서 내가 草를 잡아둔 銘을 쓰도록 하라.

당시 퇴계선생은 종1품 정승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사후에는 예조(禮曹)에서 도감(都監)을

설치해 예를 갖춰 葬禮를 치르는 것은 當然視되었다. 그럼에도 遺言을 남겨 이를 굳이 사양했다. 그리고 단지 4言 24句의 九十六字 自銘으로 自身의 삶을 壓縮整理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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