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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이주부공사적

  • 운영자
  • 2008-07-03 오후 2:5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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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 10월에 『도산문집』 중간의 일로 고을 사림들이 서원에서 회합을 했는데, 이주부의 고사에 감회가 있어 사의하기를, ‘재물을 출연하여 비석을 세워서 그 묘소를 드러내자’ 고 하였다. 또한 서원 벽에 걸린 옛날 현판은 오래되어 완결이 심하여 휘영에게 글을 새로 쓰라고 위촉하였다.

 

삼가 옛날 현판의 기록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다.


군의 성은 이씨요, 이름은 운이니 농암선생의 증손이다. 임진년 난리에 왜구가 졸지에 인근에 쳐들어와 분탕질의 우환이 바로 코앞에 닥쳤다. 군은 이 곳 도산서원 사무를 관장하는 소임을 맡고 있었는데, 집안의 권속은 돌아보지 않고 위판을 받들고 나가 외지고 정한 곳에 숨어 있어 다행히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기타 서책 등의 물건도 그의 관리와 보호에 힘입어 흩어지지 않게 되었다. 난리가 진정된 뒤 유림의 장로들이 모여 논의를 하여 관청에 그 사실을 올렸는데, 관청에서 또한 지극하게 여기어 포상을 가하고, 지령을 내려 그 자손들을 보호하라고 하였다. 서원의 문서 상자에 그 서류가 보관되어 있어 알 수 있다.

 

군이 한 일이 이렇게 훌륭한데도 한 장의 문서 이외에는 다른 기록이 없고, 세대가 점점 멀어져 이 사실을 아는 이도 거의 없다. 장차 난리를 당해 의를 취한 사람의 행적이 아주 없어지게 되어 일컬을 것이 없다면, 어찌 사림의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서원에 모이는 날에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 간략하게 전말을 써서 벽에 걸어두고 매년 기일에는 제사 부조로 약간의 물건을 준비하여 서원에서 항상 잊어버리지 않는 자료로 삼았다. 운운,


현판에 연대가 쓰여 있지 않으나 서원 소장의 문서를 상고하니, 공이 죽은 지 40년 되는 무오년이다. 당시에는 일어난 일을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에 기문에서 ‘다만 그 대강만을 기술한다’고 일렀던가. 근래 이광뢰 공이 쓴 행장을 살펴보니 공은 소시부터 기개와 절개가 높고 성장해서는 붙잡아 지키는 것이 확고하였다. 도산서원이 창건된 후, 사림에서 공을 추대하여 사무를 주관하게 하니, 서원에 딸린 건물을 중수하고 전지나 기물을 조처하여 마련한 것이 많다.

 

임진년 난리에 도산서원의 서적을 취하여 당 아래 땅을 파 갈무리하고는 위판을 받들고 나가 산 뒤의 서당에서 청량산으로 갔다가, 돌아서 흥주의 소수서원에 이르러, 위판을 봉안하고, 날마다 분향하며 치성을 드렸다. 난리가 진정되자 돌아와서 원래대로 봉안 하였다. 정유년에 난리가 다시 일어나자, 곽망우의 진영으로 달려갔거니와 『화왕수성동고록』에 그때의 사적이 실려 있다. 기해년에 『도산문집』을 간행하자, 심력을 다해 시조일관 감독을 하면서 소홀함이 없었다. 임술년에 추천을 받아 군자감 주부가 되고, 뒤에 군자감정에 증직되었다고 한다.

 

위의 내용은 예전의 기문에서 빠지거나 간략하게 처리되어 감히 추가하여 기록한 것이다. 현판이 새로 만들어지자, 선비들이 논의하여 구판이 조금 외진 곳에 걸려 있다 하여, 이에 광명실 뒷벽에 옮겨 걸어둔다.


 

1984년 11월에 이휘영은 삼가 짓다.

 

출처: 안동민속박물관, 『안동의 현판』(하), 도서출판 성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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