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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과 매화시

  • 이동구
  • 2009-03-23 오전 7: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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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선생과 매화시

                                                                이동구

퇴계선생의 생애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에서 출생하셨고, 출생 후 7개월 때 부친께서 별세하여 모친(母親) 춘천박씨께서 농사와 누에치기로 가계를 운영하셨다.

 모친 박씨는 자녀에게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을 더욱 조심하고, 과부자식이라고 업신여기지 않도록 남보다 백 배 더 힘 쓰라”고 훈계하시었고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그 의리를 가르쳐주고 식견과 사려는 군자와 같았다”고 퇴계선조께서 모부인의 묘비명에 회고하셨음을 미루어보면 학문과 인격형성에 모부인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6세 때 이웃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부터 숙부(叔父) 송재공(松齋公)께 논어(論語)를 배우고 유학공부에 전념하여 20세에 무리한 공부로 속병을 얻어 평생 고생을 고생하셨다.


 21세에 허씨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여 27세부터 각종과거에 응시하시다가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신다.


 이후 10년간 벼슬길이 순탄하여 성균관사성(종3품)이르러 야인생활의 뜻을 품고 52세까지 3차례나 소환 당하시며 야인생활로 접어드는 과도기를 맞이하신다. 이시기의 주목되는 사건으로 ① 43세 사헌부 장령을 병환으로 사임하셨으나 계속 승차하여도 병환으로 부임하시지 못하기도 하였음에도 성균관 사성이 되고 말미를 얻어 귀향하여 예빈시 부정에 제수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이때 남명 조식에게 벼슬길에 나간 것을 후회하시고 고향에서 공부에 열중할 뜻이 있다는 편지를 보내셨다.② 46세때 퇴계 동암에 학문의 처소로 할 암자인 양진암을 짓으셨음.③ 48,49세때 스스로 외직을 구하여 단양과 풍기군수 역임. ④ 군수를 세 번 사직하여도 수락되지 않아 무단귀향으로 임소이탈의 죄목으로 직첩박탈(50세). ⑤ 27세때 허씨부인 별세와 30세에 재혼 권씨부인이 46세때 별세, 48세떄 둘째 아들(寀)까지 잃음.⑥ 50세 때 형 온계공 사화의 격동 속에 간신배의 모함으로 장류되다가 도중에서 별세 등이 있었다.


 52세때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거셔서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르셨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여 이후부터 반복되는 임명과 사직으로 형식적으로는 70세(판중추부사)의 연세로 별세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본인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퇴계선조의 노년기이다.


 학문적 업적은 청장년기의 저술은 별로 없고 50대에 성균관 대사성을 사직하고 연구업적이 시작된다. 개정천명도(53세)부터 답기명언서개치지격물설(70세)까지 22편과 기타의 저술을 내 놓으셨다. 2번째 귀향하여 한서암을 지으실때(50세)부터 따르는 선비가 많을 뿐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상계, 죽동, 하동 등지를 옮기시다가 도산서당을 지으시고(60세) 이곳을 중심으로 스스로 학문을 키우는 동시에 후진을 인도하심이 별세하시기 전날까지 계속하시었다.


 별세하시기 4일전(1570년12월4일) 조카[甯]에게 유계(遺誡)를 쓰게 하시니 “첫째 예장(禮葬)을 사양하고, 둘째 비(碑)는 세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전면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鄕里)와 세계(世系)와 지행(志行)과 출처(出處)를 진술하기를 가례(家禮)중에 있는 바와 같이 하라.”고 하셨고,  별세하시던 날(1570년 12월 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하시고 유시(酉時)에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하시고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 엄연(儼然)히 돌아가시었다.


퇴계선생 시(詩)에 대하여

 

 공자 맹자를 비롯된 유학자의 문학관은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작품이 아니라 도리와 문학의 일치[道文一致]를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은 시를 통하여 도리를 밝히는[以詩明道] 전통을 이으면서 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사상 그리고 윤리를 밝히려 하였다. 그러므로 도리가 실려있지 않은 시는 적어도 유학자의 경우에는 시로서 그 품격이 떨어졌다.

  퇴계선생의 경우에도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사상[天人合一 思想]』을 보여준 시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일본학자 高橋進은 「퇴계는 초월자인 신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사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즉 각자 자기의 생사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자기의 운명은 자기의 마음과 성정(性情)에 좌우될 뿐이다. 이것이 퇴계학의 독특한 면이다」고 한바 있다.

 이와같은 철학적 사상을 많은 저술에서 밝히셨지만 이를 근본으로 시를 지으시고 실천의 의지를 다짐하셨다는 것이다.

 선생 시를 연구하는 중국학자 왕소(王甦)는 선생께서 시에 관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여 지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주로 도연명의 감정, 두보의 품격과 규칙, 소동파의 아름다운 말씨, 주자의 사상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이란 사랑하는 것[愛之者]이 좋아하는 것[好之者]만 못하고 좋아함이 즐겨하는 것[樂之者]만 같지 못하다. 도연명. 두보. 소동파에 대한 태도는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만 주자에 대하여는 사랑할 뿐 아니라 좋아하고 즐겨하기에 조금도 권태로움이 없이 평생 한결같으셨다」고 한다.

 한시(漢詩)는 일반적으로 작품의 문맥이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작품외적 사실에 깊이 그리고 은미(隱微)하게 연계되어 있는 일이 많다, 퇴계선생의 시가 특히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께서 스스로 「처음 읽으면 비록 냉담한 것 같지마는 오래 두고 읽어보면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하며, 문맥 밖의 문맥은 주로 현실의 인간관계와 도학의 논리가 된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시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意想]은 많으나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선계(仙界), 달빛, 매화가 있다. 이 들의 공통점은 “깨끗하고 고요함[淸淨] 또는 맑고 참됨[淸眞]이다” 선계는 깨끗한 공간, 달빛은 고요한 분위기, 매화는 맑은 빛이다. 이 들이 둘 또는 셋이서 서로 얽혀 나타나면서 깨끗하고 고요하고 참된 세계를 바라면서 찾고 즐기는 것이 선조의 도학시의 세계이다. 이것이 곧 주리론(主理論)의 시적(詩的) 대응이라고 한다.


 퇴계선생께서 남기신 시가 증보퇴계전서(내집 5권, 별집 1권, 외집 1권, 속집 2권)에 2,013수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고(왕소 중국담강대 교수), 또 1,200여제에 2,270수가 전한다. 고도 하고, 내용은 잃어버리고 제목만 전하는 것이 800여제나 된다. 고 하고 있다(이동환 고려대 교수). 수량으로 본다면 중국의 시성 두보의 1,405편보다 많다. 다만 두보는 장편이 많고, 퇴계선조는 절구가 많아 편폭은 두보에 비하여 적다 할 것이다.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주자보다는 배 가까이 많다고 한다.


 15세부터[石蟹 : 가제] 70세의 돌아가실 때[而得寓精舍四絶見投今和其三 : 11월에 유응현의 시에 화답한시 임] 까지 시를 지으셨으며, 시를 본격적으로 지으시기는 33세(계사, 1533년)부터인데 37세(정유, 1537년)부터 39세(기해, 1539년)까지 3년간은 한 수도 짓지 않으셨다. 이때는 모부인 박씨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어 슬픔이 스미어 시를 지으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 163수나 지어 일생 중 가장 많은 시를 지으신 해는 61세(신유, 1561년) 때에 이다. 이 해에는 말에서 떨어져 신병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시며 도산서당 앞에 절우사를 꾸미신 해로서 마음이 가장 안정되신 해였다고 한다.


매화시에 대하여


퇴계선생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매화시 91수를 모아 《梅花詩帖 : 매화시첩》이라는 독립된 시집(詩集)을 유묵으로 남기셨다(상계종택 소장 ; 오래동안 영인출판되었음) 매화시는 모두 75제 107수(시첩 62제 91수)로 단일 소재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화는 세속의 티끌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풍속에 굴하지 않는 절개와 봄날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많은 문인들이 달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시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꽃망울 틔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우주의 기별자로서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께서는 겨울을 이겼다. 라는 경직된 절의(節義)만으로 매화를 대하지는 아니하셨다. 우주를 유연하게 깊은 안목으로 절의를 해석하여 고상한 인격체의 표상으로 대하셨다.


 특히 절우(節友 ; 梅 蘭 松 竹 菊) 중에도 유독 매화를 매우 사랑하시었다. 매화로서 적막함을 달래셨고, 매화를 찾는 것을 신선과 봄과 같이 여기시었으며, 돈독하게 좋아하는 정은 가까운 벗과 같이 친하시었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일이 여삼추 같았으며, 어느 때고 관심이 식은 적이 없고, 조급할 때나 위태로울 때에도 매화를 잊지 않으시었으며,  매화를 읊음은 심사를 의탁하시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매화분을 딴 곳으로 옮기라 하시고「매형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하셨으니 본인의 추한 모습으로 인하여 매화도 추해질 것을 걱정하시었고, 운명 직전에 주위사람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시었으니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까지 매화를 잊지 못하시었다.

 선생께서 42세(임인, 1542년)때부터[玉堂憶梅] 70세(경오, 1570) 봄까지[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매화를 주제로 시를 지으셨으나 대부분이 중년 이후에 지으신 것으로 노년에 들어 도학이 무르익을수록 매화시를 많이 지으셨으니 매화시와 도학적 정신세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많은 매화시에서 매화를 실로 여러 면으로 묘사하셨다. 그러나 그 여러 면의 많은 부분을 아우르는 것은 크게 보아 『깨끗하고 맑음[淸淨] 또는 깨끗하고 참됨[淸眞]』이라고 한다.


 선생께서 68세(1568년) 7월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시어 69세(1569년) 정월28일에 도산의 매화를 그리워하시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憶陶山梅        도산 매화를 생각하다

   湖上山堂幾樹梅  호숫가 도산서당 몇 그루 매화꽃이

   逢春延停主人來  봄철을 맞이하여 주인 오길 기다리네.

   去年已負黃花節  지난 해 국화시절 그대를 버렸으나

   那忍佳期又負回  아름다운 그 기약 어찌 또 버릴까

   丙歲如逢海上仙  병인년이 되어서는 바다 신선 만난 듯

   丁年迎我似登天  정묘년은 나를 맞아 하늘에 오르는 듯

   何心久被京塵染  무슨 마음 오랫동안 풍진에 물들어

   不向梅君續斷絃  매화와 끊긴 인연 다시 잇지 못하는고.

   * 병인년(1566.명종21)1월26일에 왕명으로 상경 중 득병으로 3월15일에 귀향

    * 정묘년(1567.선조원년)6월14일에 왕명으로 상경하여 8월10일에 낙향

라고 하셨고,

3월 2일에 낙향윤허의 언질을 받으시고 3월 3일에 玩賞하시던 盆梅와 이별의 아쉬움을


   漢城寓舍盆梅贈答 서울 집에서 분매와 주고받다.

   頓荷梅仙伴我凉  매선이 정겹게도 외로운 이 몸 벗해주니

   客窓蕭灑夢魂香  객창은 쓸쓸해도 꿈속은 향기로 왔네.

   東歸限未攜君去  그대와 함께 못 가는 귀향길이 한이 되나

   京洛塵中好艶藏  서울의 먼지 속에서도 고운 자태 지녀주오.

   盆梅答            매화가 답을 하다

   聞說陶仙我輩凉    듣자하니 도선도 우리 마냥 외롭다니

   待公歸去發天香    임께서 오시기를 기다려 좋은 향기 피우리니

   願公相對相思處    바라오니 임이여 마주 앉아 즐길 때

   玉雪淸眞共善藏    옥설과 같이 맑고 참됨을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

       * 東歸 : 竹嶺을 넘는 길, 西歸 ; 鳥嶺을 넘는 길

        * 陶仙 : 도산에 있는 신선, 즉 도산에 있는 매화

라고, 주고받으시고 3월 5일에 서울을 떠나 3월 17일에 도산에 도착하시어 도산의 매화와


   季春至陶山 山梅贈答   늦봄에 도산에 이르러 매화와 주고받다

   寵榮聲利豈君宜  부귀와 명리는 어찌 그대와 어울리랴

   白首趨塵隔歲思  풍진 좇은 지난 삶에 백발이 다 되었네

   此日幸蒙天許退  지금은 다행히도 낙향 윤허 받았으니

   況來當我發春時  하물며 오심이 내가 활짝 꽃 필 때였던가.

   主答              주인이 답하다

   非緣和鼎得君宜  和鼎이 탐이 나서 그대 사랑함 아니라

   酷愛淸芬自詠思  맑은 향기 좋다보니 사모하여 절로 읊네

   今我已能來赴約  나 이제 기약대로 그대 앞에 왔으니

   不應嫌我負明時  꽃 핀 시절 놓칠망정 허물은 말아주오

        * 和鼎 : 옛날에 매실을 쪄서 조미료로 사용하는 것

라고 반가움을 나누시고, 4월 2일에 서울에 남겨 둔 매분에 대한 그리움을


   次韻奇明彦 追和盆梅詩 見寄 기명언이 화답해 온 분매시를 차운하여 보내다

   任他饕虐雪兼風  그대를 모진 눈바람 속에 맡겨두고

   窓裏淸孤不接鋒  나는 창가에서 淸孤히 탈 없이 지났다네.

   歸臥故山思不歇  고향산천 돌아와도 그대 걱정 그치지 않으니

   仙眞可惜在塵中  仙眞한 그 모습이 티끌 속에 있음이 애처롭네.

         * 奇明彦 : 奇大升(1527~1572, 號 高峯)

라고 읊으시고, 70세(1570년) 3월 27일에 손자 안도와 함께 찾아온 서울의 분매를 맞이하여



    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서울에 있는 분매를 호사자 김이정이 손자 안도에게 부탁하여 배에 싣고 보내오니

      기뻐서 이를 시제로 삼아 한 절을 읊다.


    脫却紅塵一萬重  먼지를 뒤로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來從物外伴癯翁  속세밖에 찾아와 여윈 늙은이와 짝을 하네.

    不緣好事君思我  안달하는 그대가 이 몸 생각 없었다면

    那見年年冰雪容  빙설같은 그 얼굴 해마다 어찌 볼까.

           * 金而精 : 金就礪(1526~?, 號 潛齋)

           * 安道 : 李安道(1541~1583, 號 蒙齋, 퇴계 맏손자)

라고 다시 만나는 기쁨으로 읊으신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1570.12.4.)에 본인의 불결한 모습을 매화분재에게 보이기를 싫어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하시고, 돌아가시기 직전(1570.12.8.아침)에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소설가 최인호(소설 유림 6권239쪽)는 “생전에 그토록 상사하던 매분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이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이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상생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는 심오한 최후의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退溪文集讀會. 編譯. 매화시. 서울 교육과학사. 2004.

 李東翰. 眞脈 第3號. <以詩明道의 退溪詩>. 서울 진성이씨서울화수회. 2003.

 尹絲淳 譯註 退溪選集. <退溪의 生涯와 思想>. 서울 玄岩社. 1993

 王甦 著, 李章佑 譯. 退溪詩學(改譯版).  대구 中文出版社. 1997

 金光淳 譯. 註解 退溪先生年普.  대구 國際退溪學會大邱慶北支部. 1992

 李東歡. 陶山書院. 李佑成 編<퇴계의 시작 개황과 그의 작품세계> 서울 한길사. 2001

 李東歡. 退溪學報 第19輯. <退溪의 詩에 對하여> 서울 退溪學硏究院, 1978

 鄭錫胎. 退溪學硏究 第5輯. <退溪의 梅花詩에 對하여>. 서울 檀國大 退溪學硏究所.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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